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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노프로필.jpeg

Artist

tuk'no

b.1960

탁노, 그는 냅뜰성 있는 혼돈과 야성의 뒷배를 거느린 자신을 세상 무엇보다 기껍고 뿌듯해하며 또 그만큼의 화폭에 드리울 화인의 무게감을 고민 했을 것이다. 그것은 순연한 고독의 붓이다. 온몸으로 온마음이 궁리하는 붓은 기교와 내용과 형식을 따로 구분하지 않았을 것이다.

범박하게 말해 탁노 화백은 코끼리나 말, 닭, 늑대, 사자 같은 짐승(brute) 자체의 정형화된 형상(形象) 자체를 그리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좀 더 사실적이고 정치한 묘사력을 얼마든지 발휘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일차적인 자연 대상물의 재현이라는 사생적 복원은 그의 취지가 아닐 것이다. 그는 보기 드물게 작가가 지향하는 본래적인 존재의 이상, 혹은 추구해마지않는 삶의 원형으로서의 미학적 시원에 대해 참구하는 나름 철학적 동기(motivation)가 웅숭깊은 화인이다.

캔버스에 드리운 그의 화폭을 일별하기만 해도 그의 표현은 이미 단순한 변주나 기교적 왜곡과 기법상의 과장법, 혹은 고도의 데포르마시옹을 이미 수용하고 초탈한 듯한 인상을 받는다.

​보다 근원적으로 그의 미정형적인 추상성 속에 배태되어 있고 갈마들어 있는 일종의 무한한 혼돈의 색채와 미분화된 형상에 주목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그의 그림 속의 대상은 이 혼돈이 잠시 형상의 맛과 멋을 보여준 지극히 일부(part)의 드러남에 오히려 남다른 묘미(charm)가 있다. 이런 일부의 정치한 표현이 전부를 환기하거나 실제의 짐승을 특징적인 이미지를 화면에 틈입시킴으로써 자연이나 야성에 대한 환유의 뉘앙스를 드리우는 것은 그의 화폭이 지닌 폭발력이자, 화폭에 드리운 야성의 상징성에도 부합한다. 그런데도 이 일부의 구상적 디테일(detail)이나 형상으로 드러난 내색이 전체를 포괄하는 정치성을 띤다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구상적으로 화면 전체를 도배를 하듯 하지 않아도 된다는 탁노의 담대한 화면 전략과 포부는 나머지 추상적인 화면 구성을 더욱 심오한 부분으로 상승시킨다. 

​더불어 이런 상징적인 구상의 부분은 나머지 혼돈의 색채와 형상의 덩어리와 두동지지 않으면서 무한한 확장의 기미를 내포하기에 이른다. 어쩌면 지극히 일부의 내색을 드러낸 야성의 대상물은 오히려 이 나머지 미분화된 형상과 색채들의 혼재를 유의미하게 견인하면서 다양한 그리고 무한한 폭발력을 잠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탁노에게 있어서 이런 미분화된 것들은 동양적으로 보면 일종의 웅혼한 기의 상관물로 보기에 합당하다. 그 상관물의 형상은 추상이니 구상이니 하는 이분법적 분별 너머에 어웅하고 혹은 웅숭깊게 자리하는 앞서 언급한 혼돈의 활물로 봐도 좋다.

글. 유종인 (시인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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